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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만난 후배의 얼굴에 생기기 돈다. 한 달 내내 몰아쳤던 일을 마무리하고 겨우 한숨 돌리는 중이란다. 긴 한숨 끝에 후배가 목소리를 높인다.
"언니, 우리 놀아요. 강남 가서!"
 
인터뷰/글 김아람
 
최근에 많이 바빴다면서?
이제 연말이고, 연초니까 다들 쉬고 싶고 놀고 싶잖아요. 그래서 방송 4주치를 한꺼번에 준비했거든요. 매일 밤을 새웠죠. 지각했는데도 선배 언니들이 봐주더라고요. 며칠 동안 아침에 사수 언니 전화 받고 일어나서 출근했어요.

그럼 연말연시에 쉴 수 있겠네?
네. 일단은 휴가죠. 근데 휴가 끝나면 곧 설날이잖아요? 그때도 3주치 방송 준비하면서 밤새야 해요. 정말 끝나지 않아요!

방송작가의 일상은 좀 불규칙하잖아.
모든 일상이 불규칙하죠. 보통 직장인들은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저 같은 경우는 출근 시간만 정해져 있어요. 퇴근은 뭐, 대중교통 끊기기 전에 퇴근하면 좋은 거고. 집에 와서도 새벽까지 제 몫의 일이 이어져요. 그래도 지옥철을 피해 시간에 출근하는 건 좋네요.

넌 주로 무슨 일을 맡아서 해?
자료조사가 주된 업무예요. 매주 마치 흥신소에 근무하는 사람처럼 여러 연예인의 정보를 조사해요. 기본 프로필은 기본이고 과거 인터뷰, 기사 등을 취합하죠. 그렇게 하다 보면 한 사람에 대한 정보만 200페이지 정도가 돼요. 그 밖에도 간단한 섭외, 언니들이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 챙기고. 자료조사만으로 매일 밤을 새워요.

하필이면 왜 방송작가야?
갑자기 고등학교 때 저에게 글쓰기에 소질 있다고 하셨던 담임선생님이 미워지네요. 그냥 제가 소질이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문예창작학과에 갔는데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기엔 부족하고, 글로 먹고살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방송작가가 눈에 띄었고 꿈이 됐죠. 방송국에서 연예인하고 일하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처음부터 방송작가로 일하지는 않았잖아.
제가 방송작가 시작하기 전에 직장만 3번을 옮겼어요. 어려서부터 그냥 성인이 되면 빨리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돈을 벌어 내 생활을 갖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런데 대학교 2학년 때 모 프로그램 메인 작가가 특강을 하러 오셨는데, 월급이 80만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꿈을 접었죠. 월급 80만원은 너무 하잖아요? 그래서 졸업 학기에 바로 광고홍보 회사에 취업해서 1년 일하고, 대기업 계약직으로도 1년 일했어요. 2년 동안 돈을 좀 모으고 어느 정도 살만해지니 다시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방송작가가. 그래서 올해 이 일을 시작했죠. 막내 생활만 3년 넘게 하는 거예요!

월급 80만원보단 더 받긴 해도 회사 다닐 때보단 훨씬 적은 월급인데, 후회 안 해?
소속감 하나로 버텨요.

소속감이라면?
계약직일 때 소외감을 많이 느꼈어요. 나는 그냥 보조일꾼의 개념이랄까. 그런데 방송작가를 하면서 선배 언니들이 저를 혼내다가도 제가 밖에서 욕먹고 있으면 다들 “걔가 뭐라고 하든? 밖에 나가서 누가 너한테 뭐라고 하면 다 말해!”라고 챙겨줘요. 넌 우리 막내야, 우리 팀이야, 이런 소속감을 주죠. 저는 어디 소속되어 있는 걸 좋아해요. 대학교 때도 매년 학생회 활동을 했고, 고등학교 때도 교회에서 찬양팀, 성가대를 했죠.

방송작가는 프리랜서잖아. 프리랜서와 소속감이라, 조금 거리감이 있는데?
프리랜서는 한 곳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은 아니죠. 메인 작가가 되면 여러 프로그램을 맡기도 해요. 그런데 방송일은 혼자 할 수 없어요. 연차대로 경험을 쌓은 작가들이 모여서 팀을 꾸리고, 각자 맡은 역할을 해야 해요. 방송작가라는 무리에 소속된 사람이죠. 한 회사에 소속되지 않아 자유롭고, 팀을 꾸려 일하면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아요.

청춘을 투자해도 행복할 만큼 방송일에 보람을 느껴?

밤새우면서 일할 때는 너무 힘든데 다 하고 났을 때, 뭔가 행복함이 있어요. 그리고 방송에 제가 조사한 자료들이 나올 때. “어? 저거 내가 찾은 거!” 이런 재미? 제가 모은 자료들이 방송으로 나오는 일이 점점 많아질수록 “내가 이 팀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느껴요. 근데 전 아직 시키는 것만 하면 돼요. 이제 6개월 차라. 그게 오히려 방패 같기도 해요. 저보다 높은 연차의 선배 언니들은 저보다 부담감과 책임감이 더 크니까.

내년이면 이십 대가 꺾여. 항상 밤새는 시간이 억울할 것 같아.
그렇죠. 청춘인데. 20대 초반에는 앞으로 즐거운 일만 있고, 사랑이 가득하고 짜릿할 줄 알았는데 사회에 나와 현실을 살아보니, 아니더라고요. 실제로는 궁상맞고 사랑에도 실패하고 솔로인 크리스마스가 많고. 근데 남들도 다 그래요. 지금 안 힘든 친구 없어요. 금수저라도 다 자신만의 고민이 있으니까. 처음부터 자리 잡고 돈 있으면 청춘이겠어요? 처음이니까 힘든 거고, 그냥 이게 청춘이겠거니 하는 거죠. 저는 제가 스물다섯에 결혼할 줄 알았어요.

10년 뒤 어떤 공간에서 뭘 하고 있었으면 좋겠어?
공중파 야외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요. 아니면 시트콤이나 드라마 작가?

시트콤이나 드라마도 쓰고 싶어?
대학교 때 희곡수업을 좋아했어요. 지도 교수님도 너무 좋았고. 연극 보는 것도 좋아하고. 대학로 근처에서 살고 싶을 정도예요. 시나리오를 쓴다면 직장 내 권력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어요. 전 이상하게 회사 과장님들 이야기에 관심이 가요. 아빠 생각나서 그런가?

멜로는 싫어?
제가 그런 건 잘 못 써요. 사랑을 안 해봐서.

이 아까운 나이에 사랑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죠. 근데 시간이 없어요. 요즘 남자애들은 인내심이 없어요! 바쁜 여자를 기다려주지 않죠. 하긴, 어쩌다 한번 소개받아 본 건데 절 얼마큼 좋아하겠어요. 괜찮다 싶어서 다시 만나보려 해도 바빠서 못 나가고, 연락도 끊기죠.

지금은 연애보단 일이 우선인 건가
힘들지만 새로운 걸 배워가고 확인할 때 재밌어요. “내년에는 좀 더 나아지겠지, 내후년에는 더 좋아지겠지. 점점 더 잘하게 되겠지.” 라는 생각이 원동력이 돼요. 지금이 제일 재밌어요. 근데 3~4년 차 정도 돼서 일이 익숙해지면 재미없어질 수도 있죠. 후배가 답답하고. 혼내고.

내리 갈굼을 하겠다고?
저 내리 갈굼 잘해요. 근데 지금은 갈굼의 먹이사슬 끝에 있는 처지라 힘드네요! (웃음)

그래도 끝까지 버텨야지. 버티는 사람이 결국 승리한다잖아.
맞아요. 강한 사람이 이기는 게 아니라,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긴대요. 전 이 일에 이미 청춘을 바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다들 그렇게 살면 좋겠어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심정으로 버티다 보면 좋은 날 오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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