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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람
 
편의점 앞을 지날 때마다 그 애를 생각한다. 겨울이면 더 많이, 깊이, 천천히. 그 애와 나는 서로 다른 교복을 입었고 독서실과 그 옆 편의점에서 자주 마주쳤다. 자정이 되면 독서실 아이들은 우르르 편의점으로 달려가 군것질을 하곤 했는데, 북적이는 그 안에서 그 애와 나는 어깨를 부딪친 적이 몇 번 있었다. 어느 날이었던가, 하나 남은 삼각김밥을 두고 그 애와 내가 머뭇거렸던 날. 그 애는 쭈뼛거리며 내게 삼각김밥을 내밀었고 그 후부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머리를 긁적이며 인사를 건넸다.

가을비가 많이 오던 시월이었다. 새벽녘이 돼서야 비가 그쳤다. 독서실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배가 출출해 들른 편의점에 그 애가 있었다. 컵라면 코너 앞에 나란히 서서 뭘 고를까 고민하다 나도 모르게 그 애에게 물었다. “나는 이거 먹을 건데, 요 앞에서 같이 먹고 갈래?” 그 애는 나를 빤히 보다 “그래.”하고는 나와 같은 컵라면을 골라 내 것까지 물을 부어 가져다줬다.
그날 젖은 테이블에 놓은 라면 두 개는 퉁퉁 불어버렸다. 괜히 인적도 없는 거리를 쳐다보고 있느라. 분명 배가 고파 들른 편의점이었는데 한 젓가락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그날부터 그 애와 나는 매일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말들을 쏟아내는 건 언제나 내 쪽이었다.

“나는 어려서 우리가 사는 지구가 거인 외계인의 다마고치라고 믿었다? 파도치는 게 꼭 생맥주 같지 않아? 그래서 딱 스무 살이 되는 날 바다에 가서 일출 보고 맥주 마실 거야! 시월을 너무 좋아해. 내가 시월에 태어난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나중에 꼭 시월에 죽을 거야. 딱 육십 살에. 더 늙고 싶지는 않아….”
그 애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너는 참 말이 없다고 툴툴대면 소리 내 웃고는 “나는 듣는 게 더 재밌어.” 하며, 말을 멈추고 식은 라면 국물을 삼키는 나에게 “말 많이 하니까 또 배고프지?” 했을 뿐. 그 애를 만나고부터 나는 일기를 쓰지 않았다. 해가 바뀌는 내내 편의점 앞 마주 앉아 있는 그 애가 내 일기장이었다. 아침으로 엄마가 삼겹살을 구워줬던 일, 수업 시간에 소설책을 몰래 읽은 일, 총각 선생님을 놀린 일. 시시콜콜한 일상부터 그날의 감정, 날씨, 생각, 시시때때로 바뀌는 열여덟의 나를 빼먹지 않고 그 애에게 전했다. 나는 60번째 시월에도 그 애가 나의 한 부분이길 잠시 바랐던 것 같고, 그 애가 약간은 비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침대에 누워 그 애를 떠올리면 분필 소리, 혼자 노는 어린 아이, 오래된 나무, 해 질 무렵의 온기나 빛깔 같은 것들이 생각났다. 입술을 뜯고 다리를 떠는 버릇을 공유하게 됐을 무렵 다시 시월이 왔고 그 애는 부쩍 말이 늘었다.

“김광석 아저씨 진짜 멋있지 않아? 생긴 것부터 생각까지 다 닮고 싶어.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바쁘셔서 집에 안 계시니까 항상 혼자 맨밥에 간장 부어 먹었어. 지금도 먹어. 맛있어서. 난 겨울에 태어났는데도 겨울이 싫다? 너무 춥잖아….”
그해 시월에 그 애는 다가올 겨울이 싫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떠나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 나중에야 든 생각이었다. 첫눈이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나는 그 애를 볼 수 없었다. 그 애의 독서실 자리에 하얀 국화꽃을 올려 두고 집으로 돌아온 날, 명치부터 얼굴이 계속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낼 수 없어 허전하고, 적막하고, 먹먹했다. 매번 똑같은 돌에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었다. 그해 겨울엔 유독 눈이 많이 왔고, 온갖 것들이 시렸다. 그 애는 소복하게 눈 덮인 나의 울타리 안에 들어와 끝이 보이지 않는 발걸음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후로 한동안 편의점만 보면 먼 길을 돌아갔고, 못 본 척을 했다. 조금 더 지나서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껌 한 통을 사고 나와 테이블에 앉아 단물이 빠질 때까지 씹고 뱉고, 씹고 뱉었다. 사탕 하나를 사고 나와 다 녹을 때까지 입안에 꽉 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 몇 배 많아진 편의점에 내성이 생긴 건지 그 애를 떠올리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래도 시월엔 꽤, 편의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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