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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예지
 
“내 고등학교 동창 만나볼래?” 메신저가 울렸다. 발신자는 내 오랜 친구. 초등학생 때부터 눈물 콧물 뺀 사이다. 이 녀석이라면 나를 잘 안다. 우리의 숱한 연애가 끝날 때마다 같이 노래방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니까. 첫 소개팅, 너를 믿고 나간다.
소개팅 장소는 강남역. 교보타워 앞에서부터 긴장이 시작된다. 지나가는 남자들을 찬찬히 훑는다. 저 사람 같으면 좋겠다. 이 남자는 웃는 게 예쁘네. 너무 기대하면 안 돼. 괜히 나간다고 했다가 친구 욕 먹이는 거 아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잘랐을 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예지 씨 맞으신가요?” 뒤돌아본다. 그 자리에 Mr.만두가 있었다(동글동글 포동포동 왕만두 같은 그였다. 난처한 일이 생길 때면 스스로 땀을 흘려대며 물만두로 변하기도).
Mr.만두가 고른 터키 음식점. 빤한 파스타 집보다는 훨씬 낫다. 짝짓기 게임처럼 파스타 집에 줄지어 앉는 건 딱 질색이다. 처음 먹어 보는 터키 음식 앞에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기로 했다. 센스가 있으니까. 생각보다 왜소한 모습과 수더분한 옷차림이 조금 미흡하다 생각했지만, 이제 나이도 먹은 만큼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내면을 들여다봐야겠다 싶었다.


“터키 음식 좋아하시나 봐요? 저는 처음 먹어보는 건데~”
“저도 처음입니다. 직장 동료가 추천해줬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침묵)
“날씨가 좀 쌀쌀하죠?”
“저는 추위를 별로 안 타는 편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다시 침묵)
“민수랑은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들었어요. 친하셨어요?”
“네.”


맙소사. Mr.만두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게 더 이상의 센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단조로운 대화가 이어졌다. 속으로 친구에게 두어 번쯤 욕지거리를 하는 동안 그는 음식을 조금 더 시켰고, 자기는 먹지도 않고 물만 계속 마셔댔다. 잔뜩 주눅이 든 눈동자. 어디서 이런 소심남을 데려다 놨어. 어쩐지 조금씩 만두가 불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두 시간 뒤. 내가 소개팅을 한 건지 행사를 뛰고 온 건지 모르겠다. 어색한 분위기로 있기에는 성격상 안 맞아서 진행도 하고 방청객처럼 물개 박수를 쳤더니 기가 쭉 빨린다.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에서 두리번거린다. 마침 아무도 없다. 하이힐을 벗어 든다. 얇은 스타킹 아래로 아스팔트 질감이 느껴진다. 드르륵, 진동이 울린다.
‘예지 씨, 잘 들어가셨어요? 제가 오늘 너무 떨려서 즐겁게 해드리지 못했어요. 다음 주말에 저랑 같이 영화 보지 않으실래요?’
하이고, 이 양반아. 나는 집까지 걸어갈 힘도 없네요. 나도 익히 주위 사람들에게 들었다. 소개팅에 나가도 별 볼 일 없다고. 만나자마자 가슴이 쿵 내려앉는 운명적인 상대가 나타난다는 건 영화 속에서나 있는 일이니까. 집 앞 계단에서 끄응 고민을 하고 답장을 보냈다.
‘네, 좋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뭐, 한 번 더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다. 노련하게 리드하지는 못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순박하고 착한 사람도 보기 드무니까.
그 후로 Mr.만두와 백 번 정도는 더 만났다. 그는 그야말로 보기 드문 남자였다. 착했고, 착했고, 착했다. 그뿐이었다. 그는 내 앞에서 자주 불어 터진 만두가 되어 잘못을 빌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눅이 들 정도로 형편없는 외형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공기업에서도 꽤 높은 자리에 계셨고 값나가는 아파트에 살았다. 괜찮은 대학을 졸업해서 알아주는 대기업에서 근무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좋은 조건이었다. 지고지순한 그의 연애관은 오히려 가산점을 줄 항목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불안, 불안했다. 내가 한 말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고, 운전할 때는 허둥지둥하다 길을 잃기 일쑤였다. 일이 벅찼는지 살이 급격하게 찌고 탈모가 온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회사에서는 일을 잘한다고 예쁨을 받는다던데 나는 작정하고 그를 예뻐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가도 성이 났다. 세 번의 만남 중 적어도 한 번씩은 그가 사과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게 물들어 나까지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대로 맹숭맹숭한 연애를 지속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헤어지고도 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지치게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답답했던 그를 주제로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까지도 옷 잘 입는 방법이나 여자와 대화를 잘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고 싶었다. 석연치 않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몰아세우고 비판을 할 만큼 형편없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그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전혀.
건강이 좋지 않으면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면 되는 일이었다. 식당을 예약하기로 했는데 정확하게 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으면 다시 확인하면 된다. 그저 전화 한 통화면 충분하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자학했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인 걸 어떻게 해. 어렸을 때부터 쭉 이런 모습이라서 나도 나 자신이 정말 싫어’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그가 본인을 탓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나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를 탓했다. 차가 밀리는 것도, 날씨가 좋지 않은 것도. 지금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들이었는데. 그가 자신이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탓이라고 하면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소한 일이 쌓이면서 싫어졌다. 늘 주눅이 든 그가,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는 내가, 보기 싫었다.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곁에 있는 것이 그다지도 지치는 일인 줄 몰랐다.


Mr.만두. 벌써 몇 달이 훌쩍 지나갔네요. 시간이 참 빠르지요. 서툰 당신을 잘 이끌어주고 싶었는데 내가 누군가를 바꾼다는 것이 섣부른 오만이었어요. 새해에는 당신도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이것만 기억하세요. 여자들이 바라는 건 비싼 가방이나 반짝이는 목걸이가 아니라, 따스한 배려와 나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을요.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바닥만 보며 허둥거리지 말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고 진심을 말해 봐요. 사랑하는 사람을 질책하고 싶은 사람은 없죠. 아마도 당신을 이해하고 싶을 겁니다. 머피의 법칙보다는 샐리의 법칙을 생각해 보길. 당신을 행복으로 이끌어줄 거예요.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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